1500년 전 낙서 무더기로 발견, 울진 성류굴에 오목새김
1500년 전 낙서 무더기로 발견, 울진 성류굴에 오목새김
  • 권태환 기자
  • 승인 2019.04.1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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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신라 시대, 조선 시대 다양한 각석(刻石) 명문 30여 개 확인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돌에 새긴 명문이 울진 성류굴에서 대거 나왔다. 천연기념물 제155호 ‘울진 성류굴’에서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각석(刻石) 명문 30여 개가 확인됐다.
울진군은 지난 3월21일 성류굴 내부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해 길이 470m에 달하는 성류굴에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230m 떨어진 곳에 있는 종유석들과 암벽에 새겨진 명문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명문이 발견된 곳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제한된 곳이다.
동굴에서 명문이 발견된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종유석에는 ‘정원 14년(貞元 十四年)’이라고 새겨진 명문 3개를 포함해 구체적 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 여러 개와 ‘임랑(林郞)’, ‘우(牛)’ 등 화랑 이름 다수가 새겨져 있다. 이후 문화재청이 세 차례 더 조사해 ‘신유년(辛酉年)’과 ‘경진년(庚辰年)’명 등 간지(干支), 통일신라 시대 관직명인 ‘병부사(兵府史)’, 화랑 이름인 ‘공랑(共郞)’, 승려 이름 ‘범렴(梵廉)’, 조선 시대 울진현령 ‘이복연(李復淵)’ 등 명문 30여 개를 찾았다.
특히 ‘신유년(辛酉年)’과 ‘경진년(庚辰年)’과 같은 간지 연대 명문은 국보 제147호 ‘울산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을사년(乙巳年, 서기 525년, 신라)’명과 비슷한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798년에 새긴 ‘정원 14년(貞元 十四年, 원성왕 14년, 통일신라)’ 명과 조선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명 등도 찾아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 이후 조선 시대까지 여러 사람이 오랜 시간 오가며 계속해 글자들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은 석주, 석순, 암벽에 오목새김돼 있다.
글자 크기는 다양하며, 대부분 자형이 똑바른 한자인 해서체로 쓰였으나, 약간 흘려 쓴 행서도 일부 확인됐다. 
정확한 방문 시기와 방문자가 표시됐다는 점이 학술적 가치다. ‘정원십사년 무인팔월이십오일 범렴행(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 정원 14년 8월 25일 범렴이 왔다 간다)’ 등에서 보이는 ‘정원 14년’은 중국 당나라 9대 황제 덕종의 연호가 정원(785~805)인 점으로 보아 동굴 방문 시기는 서기 798년, 신라 원성왕 14년인 것으로 보인다.
화랑 이름인 ‘공랑(共郞)’, 승려 이름 ‘범렴(梵廉)’ 등 방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곳이 화랑이나 승려가 찾아오는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수련장소로도 활용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서기 524년 세워진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나타나는 해서체와 같은 서체를 보이며, 성류굴에서 발견한 것 중에는 모래시계 모양의 다섯 오(五)자도 3개나 발견돼 서예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고려 말 이곡(1298~1351)의 ‘동유기’에 처음 나오는 ‘장천(長川)’이란 말을 그동안은 ‘긴 하천’으로 해석했으나 이번에 성류굴에서 ‘장천(長川)’명이 발견되면서, 울진에 있는 하천인 ‘왕피천’의 옛 이름일 가능성이 커졌다. ‘동유기’는 고려 후기에 이곡이 지은 기행문이다.
1349년 이곡이 가을에 금강산 및 동해안 지방을 유람하고 지었다.
문화재청은 한국 고대사 자료가 희소한 상황에서 이번에 확인된 다양하고 수많은 명문은 신라의 화랑제도와 신라 정치·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 각석 명문 실측과 탁본, 기록화 작업 등 전반적 학술조사와 동굴 내 다른 각석 명문에 대한 연차별 정밀 학술 조사 및 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다.
권태환 기자 kth50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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